고통에 관한 묵상입니다.



머지않아 손가락조차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밋빛 희망의 그늘 아래,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고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일부러 귀를 막지 않는 한 여기저기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일부러 눈을 감지 않는 한 도처에서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아가 삶이 공허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미사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전혀 하느님의 위로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공허감에 봉착할 때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불안 속에서 인간은 부르짖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 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시편 42,6).
고통 속에서 인간은 절규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 저의 힘은 옹기 조각처럼 마르고 저의 혀는 입 속에 들러붙었습니다” (시편 22,2-16).
공허감 속에서 인간은 원망합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저주를 받아라, …” (에레 20,14-15). “제 영혼은 이런 고통보다는 숨이 막혀 버리기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욥 7,15).

하지만, 그대여,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 그 속에는 분명히 우리가 평소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더듬어볼 때 하느님은 자유와 풍요를 주시기 위해 광야, 곧 사막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주시기 위해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광야에서 고통스런 여정을 가게 했을 때도 거기에는 선한 의도가 서려 있었습니다.

그대여, 한계 상황은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 영국인 크리스천 영성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런 일이 생기기 전에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만드는 하느님의 확성기이다.”

그대여, 고통을 뒤집어 보면 그 뒤어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  인간의 끝은 하느님의 시작이며, 인간의 절망이 하느님의 기회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원망하고, 십자가를 내팽개치는 한이 있어도 시간 속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은총을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너의 마음 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번 사순절이 그대에게 고통의 축복을 깨닫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그대가 사도 바오로의 기쁨에 동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의 그 모든 환난에도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2코린 7,4)

– 차동엽 노르베르토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